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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contents)

탁구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1.탁구의 역사
  2.한국 탁구
  3.중국 탁구

탁구를 열심히 운동하고 관심을 가지다 보니 궁금한 것이 생겼습니다. 바로 탁구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입니다. 

중국이 탁구에 관해서는 절대 강국이기 때문에 중국인가 생각도 들지만 유럽의 강국들도 많아서요. 그리고 유명한 탁구용품 브랜드를 보면 일본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탁구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1. 탁구의 역사

탁구는 그 기원이 정확하지 않다고 합니다. 중세 이탈리아의 '루식 필라리스'라는 놀이가 변한 것이라고 설명도 하고 15세기경 프랑스의 궁전의 '라파움'이라는 놀이가 변해서 탁구가 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러나 통설은  1880년대 영국 상류층 오락인 '위프워프'라는 놀이에서 유래되었고 인도, 남아프리카등 영국 식민지에 살던 영국인들이 더위를 피해서 실내에서 놀 수 있는 놀이로 변형시켰다는 것이 통설이라고 합니다.

핑퐁이라는 단어는 공을 칠 때 나는 소리를 따서 상호를 붙였고, 이후 테이블 테니스라는 명칭으로 전 유럽에 보급되어 1900년 무렵에는 전 유럽에서 널리 탁구가 보급되었다고 합니다. 1921년 영국에서 탁구 협회가 창설되었고, 1927년에 영국 런던에서 제1회 유럽 선수권 대회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올림픽에서 탁구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것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이었습니다.

2. 한국 탁구 역사

우리나라에 처음 탁구가 도입된 시점이나 장소 어떤 경로로 들어왔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으나 1924년 '경성일일신문사'에서 주최했던 '핑퐁경기대회'를 한국탁구의 시작으로 보고 있으며 이때부터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2년 후인 1926년 같은 신문사에서 주최한 2회 대회에서 300여 명의 남녀 선수가 참가할 정도로 규모가 확대되었다. 

이때 한국의 이용렴 선수가 여자부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순수하게 우리 힘으로 열린 첫 대회는 제1회 조선탁구대회이다. 이후 해방이 되고 1945년에 조선 탁구 협회가 발족되었고 당시 동덕여고 설립자였던 조동식 씨가 초대회로 취임했다. 그리고 2년 후 1947년에 전국선수권대회가 개최 었으며 국제무대에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1950년 국제탁구연맹에 가입했다.

우리나라가 국제대회에 처음 출전한 탁구대회는 1952년 싱가포르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이며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또한 첫 세계대회는 4년 뒤인 1956년 동경에서 열린 23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였고, 여자단체 5위, 남자단체 14위의 성적을 달성했다.

한국 탁구가 본격적으로 탁구 강국으로써 부상한 시점은 1959년 제25회 도르트문트 세계대회 여자단체전 준우승의 성과를 올리면서부터이다. 이후 1973년 사라예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여자단체전 우승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보여주며 한국탁구의 희망을 보여주기 시작했으며 그 영광의 주역은 정현숙, 박미라, 이에리사였다.

이후 스타가 부재한 공백기를 가져오다가 여자선수에는 양영자, 현정화 남자선수는 유남규라는 걸쭉한 선수들이 출현하면서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단복식, 단체전 등 여러 종목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대한민국 탁구의 최고 전성기를 보여줬다.

1991년 제41회 세계대회에서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탁구 단일팀을 구성해서 세계최강 중국을 격파하는 기념을 토하며 이때의 감동스러운 스토리를  영화' 코리아'로 만들어졌다.

 

3. 중국 탁구

중국에 탁구는 20세기 초에 전해져서 비용이 많이 들지 않고 가볍게 좁은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이라서 중국전역에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중국에서 탁구는 전쟁 중에도 꾸준히 상랑 받았다는 것은 에드가스노의 소설 '중국의 붉은 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모택동은 1959년 독일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홍콩 출신 탁구선수 용국단을 추대하며 탁구 인프라를 구축하고 국민 사기를 높이고 단결시키는 정치적 도구로 이용해서 성공합니다.

하지만 문화 대혁명 때는 중국 탁구도 암흑기가 찾아옵니다. 이로 인해 용국단은 31세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중국은 문화 대혁명으로 국제대회를 한참 동안 불참했지만 1971년 일본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일본의 요청으로 새로운 동지를 찾기 위해 대회에 참가합니다. 이후 미국과도 손을 잡는데 버스를 놓친 미국선수를 중국 선수단이 태워준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양측 선수단은 친분을 쌓게 되고 언론의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이후 미국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며 중미 수교가 이뤄졌고 중국은 국제적 고립을 피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핑퐁외교'입니다. 이는 스포츠를 매개로 한 성공적인 외교사례로 남았습니다.

 

이번에는 탁구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중국 탁구선수 인구가 우리나라 인구보다 많다는 얘기가 있지요. 중국 탁구는 이런 인적 인프라로 여전히 세계최강입니다. 우리나라도 파이팅입니다.

오늘도 즐탁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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